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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Aug 11. 2018

창신동에 대한 오해와 진실

도서 <건축 왕, 경성을 만들다> 창신 동편

조선의 재벌가들이 살던 창신동

인터넷에 '창신동'이라고 검색하면 대부분 '봉제공장, 문구완구거리, 성 밖 동네, 동대문, 서민들의 주거지, 채석장'정도의 키워드가 나온다. 동대문 시장의 성장과 함께 60-70년대 성황을 이루며 산업을 이끌었던 봉제공장이 많이 모여있기도 해서 그와 연관된 정보나 기사들이 많다. 또 가난했던 시절 서민들의 주거지로서 알려진 동네이기도 하다. 가파른 한양도성 벾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엄청난 수의 주택들과 몇몇 아파트가 촘촘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현재의 창신동의 모습이고, 정체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20세기 초까지는 (1890년대~1910년대) 창신동은 부유층의 주거지이거나 별장이 있는 곳이었다.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생가도 창신동에 있었다. 백남준의 부친 백낙승은 당시 대재벌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서민들의 주거지로 인식되어진 것일까? 


1920년대 경성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경성에 거주하고 있던 빈민 혹은 지방에서 유입된 빈민들이 성 밖 동네인 창신동으로 대거 몰려 무허가 주택을 짓고 살면서부터이다. 이는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서울대학교 김경민 교수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꽤나 상세하게 진술되어 있어 창신동의 원래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병택은 창신동에만 대지 8곳 3622평, 밭 6곳 2153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당 저택은 조대비(헌종의 어머니이자, 흥선대원군을 도와 고종을 즉위시킨 신정왕후로 추정)의 가옥을 한일은행 창업자이자 초대 이사장, 조병택(한일은행은 여러 은행과의 합병과정을 거쳐 조흥은행으로, 현재의 신한은행에 이른다)이 1905년 이전 매입한 것이다. 창신동은 대왕대비가 살았던 지역이요, 은행장이 살았던 지역이었다. 비단, 한일은행 창업자 조병택만이 창신동에 살고 있었던 당대의 거부가 아니다. 그보다 더 거부였던 임종상은 창신동에 아방궁을 짓고 살고 있었다. 임종상은 1935년 소득세액 기준 서울시 두 번째 부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三千里機密室 The Korean Black cham-ber', <삼천리> 제 7권 11호, 1935년 12월)


임종상의 창신동 저택에 대한 기록이다.
"
동대문을 나서면 왼쪽 성 밑에 궁궐과 같이 우뚝 솟은 어마어마하게 큰 집이 있다. 이 집이 준공되던 당시에는 조선 안의 집으로 제일 굉장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골에서도 일부러 구경을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한참 동안 한가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었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집주인은 … 임종상 씨가 십여 년 전부터 자기의 손으로 설계를 해두고 마음에 드는 집을 짓고… 육천 칠백 평을 매 펴에 삼 원씩 이만여 원에 사서 재작년 팔월에 짖기를 시작하여… (중략) 그런데 이백육십여 칸이나 되는 큰 집을 한 바퀴 돌려면 우렁이 속 같아서 혼자는 찾아 나오기 어려울 것이요. 이 집안은 어디로(가)든지 유리같이 닦아놓은 복도가 있어서 버선에 흙 한 점 묻히지 않고 다닐 수가 있게 되었으며 … 비단 병풍과 방장으로 둘러싸서 창밖에 겨울을 모르고 추위와 주림에 신음하는 민중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분에 넘치는 호사와 끝없는 행락으로 날을 보내기에 알맞은 집이다.

'霄壤二相(소양 이상) (一(일)) 富豪(부호)의住宅(주택)과 極貧者(극빈자)의住宅(주택)', <동아일보>,1925년 1월 1일


"
임 부잣집! 이크 말도 말아라. 서에는 윤대 가리, 중앙에는 민대감, 동에는 임 부자 이것은 서울 하고도 고명한 삼대 가이다. 실로 아방궁 이상이니, 외견상으로는 감히 개구(開口)도 못하겠다(감히 구체적으로 나열도 못 할 정도다). 입만 딱 벌리고 '아구~ 굉장도 하구나' 할 뿐이다. 그저 그렇게 하고 하도 엄엄(嚴嚴)하야 들어가지도 못하고 왔다." '대경성 백주 암행기', <별건곤> 제2호, 1926년 12월


"그뿐이랴? 해동 은행 중역이었던 김성환, 남작 작위를 갖고 있었던 이근호와 민영린,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도 존재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로 평가받는 백남승(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의 부친)의 저택 역시 창신동에 있었다... (중략) 경성에 지방의 조선인들이 몰려들면서 부자와 토막 민 같은 최하층이 동시에 거주하는 지역이 된 것이다. 비록 한양도성 밖이기는 하나, 경성 중심지 종로와 코 닿을 거리에 있었기에 토막 민들이 입지 하기에 적격이었다. 이 창신동은 6.25 동란을 거치면서, 피란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그리고 현재는 패션산업의 집적지로 변모하게 된다. "

※ 위의 글은 '프레시안'에 연재된 김경민 교수의 글을 일부 발췌해 온 내용입니다. 


창신동 651번지

과거의 이러한 성격을 지닌 창신동은 당연히 조선의 개발업자들에게 개발 후보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특히나 정세권의 건양 사는 일제의 방해와 압박 속에서도 개발 범위를 넓혀가며 성장했고, 관철동, 낙원동, 관훈동, 소격동, 봉익동, 재동 등 북촌 일대를 포함하여 성 밖의 창신동까지 일제가 조선 땅을 넓히지 못하도록 하면서 그 영역을 확대해갔다. 그중에서도 창신동 651번지는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대저택을 매입해 토지 자체를 매각하거나 건물을 지어 매각한 것이다. 


아래는 1929년 2월 7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창신동 651번지 토지 매각에 대한 분양 광고 내용이다. 
"예전 조병택 집 130칸은 금월 말에 허물 터이오. 그 대지 1157평은 분할 매각 중인 바, 3월 중순이 지나도 매각되지 않는 것은 본사에서 방매가를 건축함." "창신동 651 신건 와가 9칸 내지 12칸 37동, 창신동 651 대지 분매 잔여 6백 평"   도서 <건축 왕, 경성을 만들다> p93, 95


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도 창신동 지역에 일부 저택이 존재하였음을 기억하는 증언이 있다.

"경기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대 의과대학 입학하기 전, 형편상 과외를 가르쳐야 했습니다. 동대문에서 창신동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주 큰 한옥들 몇 채 있었어요. 그 집에서 학생을 가르쳤죠. 매우 큰 집이었습니다."

- 김풍 명 의학박사 (전) 대한 피부과학회 회장 인터뷰 중 , 2015년 10월 1일 -

1969년 창신동, 사진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1969년 낙산 아파트 공사 모습이다. 서울시는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하여 1957년부터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을 지어 국민주택으로 분양했는데, 1968년 12월 3일 시민 앞 라트 2,000동 건립계획 가운데 창신숭인지구 500평이 선정되었고, 1969년 1월에는 창신동 쪽 낙산지구에 시민아파트 30동의 기공식이 있었다. 3월에는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이 일대에 아파트를 건설하였지만 와우아파트 붕괴 이후 안전과 경관 등의 문제로 1998년 낙산아파트를 철거하고 낙산 공원화 사업으로 공원을 조성하였다." -내용 출처: 서울역사 아카이브- 

1970년 동대문 인근 창신동, 사진출처: gis.seoul.go.kr

사진과 인터뷰 및 여러 자료들을 취합해서 보면 결과적으로 1970년대까지 단독주택, 연립주택, 아파트 공사를 진행하긴 했지만 한옥 밀집지역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세권이 개발했다는 그 창신동 651번지.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지도에 검색해보니 651번지 대신 651-1번지가 나와서 해당하는 장소를 다녀왔다. 한옥의 흔적은 안 보이고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651-1번지에 해당하는 귀금속 가게

651번지가 한옥 밀집지구였으니 651-1번지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테고 이 부근 모두가 다 한옥밀집지 구였을 텐데 동대문역 1번 출구~651-1번지~창신길을 따라 쭉 이어 걸어 낙산공원까지 걷는 동안 한옥은 거의 안 보이고 봉제공장, 상가건물, 시장, 다세대 연립주택, 아파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혹여나 골목길 사이에 내가 보지 못한 한옥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잠깐 샛길로 빠져 돌아보긴 했다. 아주 드물었지만 낡고 오래된 한옥이 보이긴 했는데 바닷가 모래에서 동전 찾는 만큼이나 어려웠다. 분명 오래된 한옥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낙산의 성벽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눈 앞에 펼쳐지는 모습을 내내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창신동이 넓으니깐 다른 쪽도 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골목 사이사이를 본 건 아니었기 때문에 또 지레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경사가 너무 심하다. 해방촌 보다 더 한 것 같다

"당고개길의 한 모퉁이 시작되는 창신동 골목은 창신 6가로 이어지면서 도시 한옥, 양성화된 판잣집, 단독 주택으로 이어진다. 산업화 시기 도시 한옥은 대부분 다세대 주택으로 변화하였다. 더 올라가 축대 위에는 1970년대 지은 단독 주택이 들어서 있다. 다세대 주택과 단독 주택 사이에 지어진 슬레이트로 지어진 건축물은 대부분 건축물대장에는 없었던 것들이다. 옛 판자촌이 들어선 지역으로 70~80년대 이후 새롭게 고쳐진 것들이다."

-내용 출처: 창신동의 지명 유래와 변화, 자세히 보기-

1950년대 동대문 일대 , 사진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위 사진은 1930년대 지어져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던 한옥을 리모델링하여 현재 숙박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창신 기지'가 위치한 창신동 459-35 일대 사진이다. 1950년대 촬영된 사진으로 2014년에도 여전히 낡은 한옥들이 즐비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추가적인 내용은 <묵사마의 좋은 장소 이야기>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창신동 답사는 좀 더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신동 459-35 일대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탐사해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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